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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류는 어머니에게 왜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비행기 안에서 지었는데 흐름이란 뜻이지 뭐겠느냐고 대답했다. 비행기를 뜨게 만드는 공기의 흐름과 힘의 관계에 대해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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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류는 어머니에게 왜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비행기 안에서 지었는데 흐름이란 뜻이지 뭐겠느냐고 대답했다. 비행기를 뜨게 만드는 공기의 흐름과 힘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위쪽의 흐름이 빠르면 날개가 가벼워지고 아래쪽의 힘이 그걸 들어올리는 거야. 어린 류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이렇게 말했다. 빨리 흘러가는 것들은 가벼워져. 류, 날고 싶으면 빨라져야 해. 온 힘을 다해서 달리면 어느 순간 날아오르지. 그때부터는 어디든 갈 수 있어. 하지만 멈추면 그대로 떨어져버리는 거야. 그 무렵쯤에 어머니는 이미 인생에 대해 씨니컬해져 있었다. ... 훗날 류는 어머니에게 왜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비행기 안에서 지었는데 흐름이란 뜻이지 뭐겠느냐고 대답했다. 비행기를 뜨게 만드는 공기의 흐름과 힘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위쪽의 흐름이 빠르면 날개가 가벼워지고 아래쪽의 힘이 그걸 들어올리는 거야. 어린 류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이렇게 말했다. 빨리 흘러가는 것들은 가벼워져. 류, 날고 싶으면 빨라져야 해. 온 힘을 다해서 달리면 어느 순간 날아오르지. 그때부터는 어디든 갈 수 있어. 하지만 멈추면 그대로 떨어져버리는 거야. 그 무렵쯤에 어머니는 이미 인생에 대해 씨니컬해져 있었다. 그리고 류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조금쯤 단정적이었다.
⠀아버지의 대답은 달랐다. 「울지 마라, 류」라는 오페라 아리아의 제목에서 따왔다는 거였다. 류는 생에 한번밖에 없었던 어느 아름다운 봄날 단 한번의 미소만으로 왕자를 사랑하게 된 노예의 이름이었다. 왕자는 얼음 같은 이국의 공주에게 반해서 위험 속으로 뛰어들려 하고 있었다. 왕자를 만류하지 못한 류는 결국 스스로 제 가슴에 칼을 꽂아 사랑하는 사람을 구한다. 류의 헌신적 사랑에 마음이 움직인 이국의 공주는 마침내 왕자를 받아들인다. 류는 사랑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맺어지도록 자신의 목숨을 선물했다. 아버지는 왜 그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노예의 이름을 딸에게 붙인 것일까. 운명이라는 극적 정서에 쉽게 공감하기 때문이었을까.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 부분적으로는 사실일 것이다. 누구나 지나간 일은 자기 식대로 편집해서 기억한다. 제각기 근거가 있고 심지어 또 다른 버전으로 편집을 하는 증인까지도 등장하기 십상이다. 어쨌든 류에게는 자기 이름의 연원에 대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각기 다른 설명이 두 개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비행기와 오페라. 하나가 막막한 허공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회색 두랄루민 날개였다면 다른 하나는 죽음을 부르는 눈물 젖은 오페라 아리아였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것이 과학자나 철학자 들이 밝혀내려고 했던 세상의 정돈된 이치였다면 아버지 쪽은 매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매혹은 아버지의 기질이 그렇듯 태생적으로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다.

#은희경 #태연한인생
#창비
photo #Игнати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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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 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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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 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원피스와 흰 스웨터 차림이었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의 얼굴은 희고 투명했다. 옆구리에는 책과 노트를 끼고 있었다. 속눈썹이 긴 그녀의 눈은 꿈꾸듯 먼 허공을 보았고 입술은 장미꽃잎처럼 윤기가 흘렀다. 상아로 깍은 듯한 턱이 살짝 위로 들려서 목선을 한층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두 뺨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말을 할 때마다 그 위로 검은 ...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 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원피스와 흰 스웨터 차림이었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의 얼굴은 희고 투명했다. 옆구리에는 책과 노트를 끼고 있었다. 속눈썹이 긴 그녀의 눈은 꿈꾸듯 먼 허공을 보았고 입술은 장미꽃잎처럼 윤기가 흘렀다. 상아로 깍은 듯한 턱이 살짝 위로 들려서 목선을 한층 우아하게 만들어주었다. 두 뺨은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말을 할 때마다 그 위로 검은 단발머리가 조금씩 출렁거렸다. 류의 아버지는 그 눈빛과 뺨과 입술의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상대의 말을 들을 때 그녀는 밤색 구두의 앞부리를 들고 굽으로 바닥을 가볍게 톡톡 쳤다. 숙인 얼굴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뒷목의 작고 둥근 뼈가 드러났다. 갑자기 그녀의 동작이 멈췄다.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고, 그런 다음 조용히 웃음을 지었을 때, 그리고 그녀의 얼굴 가득 그 웃음이 퍼져나가면서 마치 봄 햇살이 비쳐든 듯 갑자기 전화부스 안이 환해졌을 때, 엄청난 볼티지의 전율이 류의 아버지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녀로부터 흘러나온 그 강력한 빛은 순식간에 류의 아버지가 서 있는 곳까지 뻗어와서 그의 두 발목을 꽉 붙잡았다.
⠀그곳은 대학교 앞의 버스정류장이었다. 류의 아버지는 물론 자기의 집 방향과 상관없이 그녀가 타는 버스에 뒤따라 탔다. 그 날이 류의 부모가 처음 만난 날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졸업반인 어머니보다 한 학년 아래였다.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라면 어머니에게 애인이 있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는 순정파였다. 그것은 오히려 류의 아버지가 사로잡힌 맹렬한 불꽃에 산소가 포화된 바람을 불어넣었다. 아버지의 갈망은 산불처럼 타올랐다. 즉각 자신의 모든 낭만적 기질과 무분별한 행동력을 총동원한 끈질긴 구애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뒤따라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전교생이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술취한 사람처럼 웃고 비틀거렸다. 몽유병자처럼 홀려 있었고 장님처럼 맹목이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류의 어머니는 물론 어머니의 부모에게도 받아들여져서 약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류의 어머니가 졸업을 하고 외국계 회사의 비서로 채용된 다음 해까지도 아버지는 취직을 하지 못했다. 집안의 도움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다. 류의 어머니는 두 사람이 함께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끈질기게 부모를 설득했고 마침내는 허락을 받았다. 결혼식을 올린 며칠 뒤 난생처음 타보는 비행기 창을 통해 발밑의 구름을 내려다보는 순간에는 인생의 절정에 오른 기분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유학생 부부가 될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고 격려했으며 사랑의 성취에 도취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류라고 짓기로 한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류의 부모에게 허락된 사랑의 서정시대였다. 그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계속)

#은희경 #태연한인생
#창비
#movie #MillenniumMambo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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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쪽에 한 사람이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상처를 껴안고 그 상처를 밤마다 핥고 있는지, 눈빛은 항상 우울하고 어깨는 축 처져 말이 없는 사람이 있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 보고 앉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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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쪽에 한 사람이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상처를 껴안고 그 상처를 밤마다 핥고 있는지, 눈빛은 항상 우울하고 어깨는 축 처져 말이 없는 사람이 있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 보고 앉아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어도 고개를 떨구거나 먼 곳을 본다. 그럴 때에 무슨 말을 건네고 싶지만, 말은 안으로 삼킨다. 아주 약간 입술을 움직여 미소 정도만 띠어본다. 그러다가 헤어질 무렵, 부러 씩씩하게 인사를 나누고 씨익 웃는다. 아무 쓸모없지만, 쓸모없음이 은은히 쌓여가서 희미한 달빛 하나쯤은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부시고 환하던 모든 불빛들이 명멸하다 ...
⠀저쪽에 한 사람이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상처를 껴안고 그 상처를 밤마다 핥고 있는지, 눈빛은 항상 우울하고 어깨는 축 처져 말이 없는 사람이 있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 보고 앉아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어도 고개를 떨구거나 먼 곳을 본다. 그럴 때에 무슨 말을 건네고 싶지만, 말은 안으로 삼킨다. 아주 약간 입술을 움직여 미소 정도만 띠어본다. 그러다가 헤어질 무렵, 부러 씩씩하게 인사를 나누고 씨익 웃는다.
아무 쓸모없지만, 쓸모없음이 은은히 쌓여가서 희미한 달빛 하나쯤은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부시고 환하던 모든 불빛들이 명멸하다 잦아지고 난 후에, 그 희미하던 나의 달빛이 유일한 빛이 되어주는 밤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럴 때 나의 달빛에 온몸이 젖는 듯한 느낌이 그에겐 들 것이다. 오지 않을지도 모를 그때를 위해서 혹은 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기에, 마음에 들어온 사람을 이토록 지켜만 본다. 이 사업은 많이 적적한 일이지만, 이 적적함의 속살에는 견딜 만한 통증을 수반하는 훈훈함이 있다.

#김소연 #마음사전
photo #Li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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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에 대해 눈을 뜨기 이전, 아주아주 어렸을 적에는, 주저 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기억이 있다. 좋으면 그냥 다가갔다. 아주 어린 날의 일이다. 산책 길에 만난 반가운 강아지라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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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에 대해 눈을 뜨기 이전, 아주아주 어렸을 적에는, 주저 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기억이 있다. 좋으면 그냥 다가갔다. 아주 어린 날의 일이다. 산책 길에 만난 반가운 강아지라든가, 만져보고 싶은 물건을 향해서 주저 없었다. 손을 미리 쭈욱 뻗고 입을 벌려 웃으며 다가갔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 어떤 거부를 당했더라도 그 상처가 깊지 않았는지, 상처에 관해선 기억조차 없다. 기대하고 설레고 그래서 마음먹고 다가간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실망도 없었을 테고, 실망이 있었을지라도 짧았을 것이다. 다가갈 또 다른 것들이 세상에는 ...
⠀관계에 대해 눈을 뜨기 이전, 아주아주 어렸을 적에는, 주저 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기억이 있다. 좋으면 그냥 다가갔다. 아주 어린 날의 일이다. 산책 길에 만난 반가운 강아지라든가, 만져보고 싶은 물건을 향해서 주저 없었다. 손을 미리 쭈욱 뻗고 입을 벌려 웃으며 다가갔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 어떤 거부를 당했더라도 그 상처가 깊지 않았는지, 상처에 관해선 기억조차 없다. 기대하고 설레고 그래서 마음먹고 다가간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실망도 없었을 테고, 실망이 있었을지라도 짧았을 것이다. 다가갈 또 다른 것들이 세상에는 봄날의 꽃들처럼 만발했을 시절이었으므로.

⠀언젠가부턴 다가가지 않고 기다리게 됐다. 내가 실망을 하게 될까 봐 다가가지 못했던 건 아니다. 다가가기엔 수줍음이 너무 컸다. 다만 수줍기 때문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마냥 기다리면서, 하염없이 해가 뜨고 별이 지는 풍경들 아래에서 그 풍경을 고스란히 앓았다. 기다리고 있어서 초조하거나 힘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기다린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그냥 그대로 실컷 앓았다. 이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눈치챌까 봐 오히려 걱정했다. 들키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들킨다는 게 더 쑥스러웠기에 그랬다. 소녀 시절은 그렇게 보냈다.

⠀열정이 무엇인지, 정념이 무엇인지를 처음 알게 된 때에, 그러니까 관계에 대해 눈을 처음 뜨게 된 그때에는, 언제나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고민하게 됐다. 고민에 빠져서 내가 무엇을 향해 다가가려고 하는지마저 잠깐씩 잊을 정도였다. 그때는 고민이라는 말보다는 어쩌면 계산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관계에 대해, 꼭 원하는 것을 얻고 싶기에, 조심스러워서 하던 갈등이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꼭 잃을 것만 같아서 다가갔고, 다가갔다가는 꼭 상처를 입을 것만 같아서 기다렸다. 서성이느라 모든 날들이 피곤했다. 불 켜진 그 집 창문을 바라보거나, 텅 빈 그네에 앉아서 고민에 빠지거나,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 꼭 만날 것만 같은 길목에서 불철주야 서성였다. 그 와중에서 행복에 빠지기도 했고 불행에 빠지기도 했다. 행복이거나 불행이거나 간에, 그 어디든 빠져서 허우적대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다가갈까 기다릴까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됐다. 이것은 살아온 날들이 만든 현명한 태도이지만은 않다. 정념의 불꽃을 다스렸다는 절제 또한 아니다. 소중한 것들이 내 품에 들어왔던 기억, 그 기억에 대해 좋은 추억만을 갖고 있진 않기에,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일종의 비애인 셈이다. 나를 충족시키는 경우보다 결핍 그대로가 더 나은 경우를 경험해보았다. 그것은 나만을 생각했던 시절들을 지나와서 관계 자체를 배려하게 됐다는 뜻도 있지만, 그 배려에는 쓰디쓴 상처의 흔적들이 배어 있다. 지켜보고 있음이 꽤 오랫동안 변치 않는 은은한 기쁨을 선사해줄 거라는 패배 비슷한 믿음도 또한 있다. 그러므로 바라던 것이 나에게 도래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라던 것들이 줄 허망함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외면'이란 감정의 부축을 받으며.
(계속)


#김소연 #마음사전
photo #yat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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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당신의 모습을 기억해 내지 못해 괴로웠던 날, 또 다른 당신은 나를 위로한다. 당신은 내 상황을 모르고 당신은 당신의 말을 하지만, 그게 위로가 된다. 당신은 같은 말을 반복한다. 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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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당신의 모습을 기억해 내지 못해 괴로웠던 날, 또 다른 당신은 나를 위로한다. 당신은 내 상황을 모르고 당신은 당신의 말을 하지만, 그게 위로가 된다. 당신은 같은 말을 반복한다. 돈을 뜯는 사람에게서 도망친 적이 있고, 수상해 보이는 행인에게서 도망친 적이 있고, 귀찮은 일에서 도망친 적이 있고, 가끔은 신에게서도 도망친 적이 있지만, 가장 힘든 것은 지난 기억에서 도망치는 일입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 망각의 알약을 시판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미 됐을 수도 있죠. 그 알약의 발명 뒤에도 엘리자베뜨의 특명이 깔려 있는 겁니다. 망각을 유행시키려는 그 ...
⠀내가 당신의 모습을 기억해 내지 못해 괴로웠던 날, 또 다른 당신은 나를 위로한다. 당신은 내 상황을 모르고 당신은 당신의 말을 하지만, 그게 위로가 된다. 당신은 같은 말을 반복한다. 돈을 뜯는 사람에게서 도망친 적이 있고, 수상해 보이는 행인에게서 도망친 적이 있고, 귀찮은 일에서 도망친 적이 있고, 가끔은 신에게서도 도망친 적이 있지만, 가장 힘든 것은 지난 기억에서 도망치는 일입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 망각의 알약을 시판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미 됐을 수도 있죠. 그 알약의 발명 뒤에도 엘리자베뜨의 특명이 깔려 있는 겁니다. 망각을 유행시키려는 그 음모가 두렵지만, 다 뜻이 있을 거예요. 그 전까지는 우리는 술을 마셔야 해요.
⠀당신의 말은 반복된다. 벌써 당신의 필름은 끊겨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복되는 당신의 말이 내게는 위로가 된다. 당신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약한 취기를 느낀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정말 그 알약에 효능이 있다면, 그 속에는 긴 시간을 꽉 눌러 압축한 성분이 들어가 있을 거예요. 망각을 이루는 성분이 있다면, 오로지 시간이니까요.”
⠀아니요, 술입니다. 술은 단축시킬 수 있어요. 망각을 독촉할 수 있어요. 당신은 말이 많아진다. 이상한 절실함이 당신을 부지런하게 만들고 서두르게 만들고 초조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술에서 깨어나도록 만든다. 당신이 서둘러 말한다. 저기요, 같이 술 한잔 안 할래요?
⠀술 한잔 할래요, 가 아니라 술 한잔 안 할래요,라고 묻는 마음을 안다. 부정 속에 쑥스러움과망설임을 숨길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나도 안다. 내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전화가 끊어졌지만 당신은 다시 전화하지 않는다.

#해마날다 #윤고은 #이효석문학상수상작
#문학의숲
photo by #NanGol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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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잔이 최초의 주인을 떠나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지다 보면 나중에는 술잔의 주인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것처럼 말도 최초의 주인을 떠나 이 혀에서 저 혀로 옮겨지다 보면 경계가 모호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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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잔이 최초의 주인을 떠나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지다 보면 나중에는 술잔의 주인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것처럼 말도 최초의 주인을 떠나 이 혀에서 저 혀로 옮겨지다 보면 경계가 모호해진다. 내 이야기가 네 것이 되고 네 이야기가 내 것이 되고, ‘제 친구가요.’ ‘내 친구 얘긴데’, 하면서 시작했던 말들이 ‘제가요’, 혹은 ‘내 얘긴데’, 로 변환되거나 더 나아가 고객의 이야기에 내 일상이 뒤섞이는 경우도 생긴다. ⠀금요일의 당신이 묻는다. 50도 이상 되는 술 먹어 봤어요? 나는 마셔 본 적이 없지만 상상으로 충분히 당신과 교집합을 만들 수 있다. ⠀“몇 ...
⠀술잔이 최초의 주인을 떠나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지다 보면 나중에는 술잔의 주인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것처럼 말도 최초의 주인을 떠나 이 혀에서 저 혀로 옮겨지다 보면 경계가 모호해진다. 내 이야기가 네 것이 되고 네 이야기가 내 것이 되고, ‘제 친구가요.’ ‘내 친구 얘긴데’, 하면서 시작했던 말들이 ‘제가요’, 혹은 ‘내 얘긴데’, 로 변환되거나 더 나아가 고객의 이야기에 내 일상이 뒤섞이는 경우도 생긴다.
⠀금요일의 당신이 묻는다. 50도 이상 되는 술 먹어 봤어요? 나는 마셔 본 적이 없지만 상상으로 충분히 당신과 교집합을 만들 수 있다.
⠀“몇 달 전에 먹어 본 적이 있는데,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 같더군요.”
⠀당신은 목에서 꽃이 피는 거 같았다고 말한다. 목에서 꽃이 피는 당신의 이미지가 내 아버지로 연결된다. 지난해 봄, 난이 꽃대를 올리지 않자 아버지는 소주를 물에 희석해서 화분에 뿌렸다. 왜 소주가 거름 역할을 하는지 묻자, 아버지는 꽃들이 술에 취해서라고 했다. 꽃이 취기를 거름 삼아 꽃대를 올리는 동안, 아버지의 봄도 지나갔다.
⠀아버지가 구조 조정의 바람에 휩쓸린 것은 올해 봄이 끝날 무렵이었다. 이번 꽃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절로 폈다. 취기를 거름 삼아 마음을 달랜 것은 오히려 아버지였다. 술은 확실히 몇 시간 정도는 거름 역할을 했다. 아버지의 일과는 술, 아니면 잠, 이었다. 아버지는 지난 몇십 년간 그 외의 취미를 익히지 못했다.
⠀“술에 취하면 꽃이 피잖냐. 너도 술 좀 먹어라. 그렇게 먹어 가지고 쓰겠냐. 예뻐지려면 사발로 마셔야지.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냐.”
⠀한 집당 품을 수 있는 백수의 수는 최대 한 명인데, 이제 우리 집에는 백수 한 명이 늘어났으니 큰일 났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결국 내 밤에 전화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서야 아버지의 얼굴빛은 조금 나아졌다. 그게 네 달 전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얼굴빛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조급했다. 멸종된 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자주 멸종 위협을 받는 천연기념물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당신처럼.
⠀봄이 지나갔고 꽃은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봄이 지나갔어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꾸 술을 마시고 말수가 줄어드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버지는 자주 꽃처럼 누워 있었다. 벌이나 나비가 아니라면 절대 방해해서는 안 될 것처럼 고요히, 이 세계로부터 수혈을 받듯이. 아버지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아도 괜찮아요, 직장이 꽃은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 대사가 너무 어려웠다. 직장은 확실히 꽃은 아니어도 직장 없는 삶은 그게 의도한 바가 아니라면 외로웠다.

#해마날다 #윤고은 #이효석문학상수상작
#문학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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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용자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이상이면 발신이 정지되는 휴대폰이 등장했다. 이 같은 ‘음주 통화 방지’ 기능은 최근 휴대폰 발전 방안 공모전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은 아이디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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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용자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이상이면 발신이 정지되는 휴대폰이 등장했다. 이 같은 ‘음주 통화 방지’ 기능은 최근 휴대폰 발전 방안 공모전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은 아이디어로, 사용자의 입김이 닿는 부분에 음주 측정 센서가 부착되어 있다. 사용자가 음주 통화를 한다고 판단되면 휴대폰 발신이 제한되고, 사용자의 알코올 농도가 0.05% 아래로 희석되면 다시 발신 기능이 회복된다. 음주 통화가 음주 운전 못지않은 정신적ㆍ물질적 피해를 불러오는 점을 고려할 때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후략) ⠀ ⠀이것은 실제 신문 기사가 아니라 사장이 ...
⠀사용자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이상이면 발신이 정지되는 휴대폰이 등장했다. 이 같은 ‘음주 통화 방지’ 기능은 최근 휴대폰 발전 방안 공모전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은 아이디어로, 사용자의 입김이 닿는 부분에 음주 측정 센서가 부착되어 있다. 사용자가 음주 통화를 한다고 판단되면 휴대폰 발신이 제한되고, 사용자의 알코올 농도가 0.05% 아래로 희석되면 다시 발신 기능이 회복된다. 음주 통화가 음주 운전 못지않은 정신적ㆍ물질적 피해를 불러오는 점을 고려할 때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후략)

⠀이것은 실제 신문 기사가 아니라 사장이 만든 홍보 문구로, 사실상 음주 통화 방지 기능을 광고하는 것이 아니라 음주 통화를 권장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휴대폰에 음주 통화 방지 기능이 장착되자 이 같은 기능이 없는 구형 휴대폰이 중고 시장에서 거래되거나 공중전화카드가 불티나게 팔렸다는 식의 이야기가 바로 뒤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결국 음주 통화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므로, 타박하거나 외면할 것이 아니라 아예 양성화하자는 것이 이글의 요지다. “그 음주 통화 양성화의 길목에 바로 ‘해마005’가 있습니다.”가 마지막 문장이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술 먹고 하는 ‘진상 짓’ 중 최고봉이 술 먹고 전화하기, 술 먹고 이메일 보내기, 술 먹고 팩스 보내기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전화는 늘 휴대한다는 점에서 가장 위험하다. 음주 통화가 음주 운전처럼 법적인 구속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위험한 요소다. 근절하려는 의지가 생기지 않아서다.
⠀휴대폰 배터리는 밤사이 어느 지점에서 끊어진 당신의 기억보다도 수명이 질겨서 다음 날 아침 인정하고 싶지 않은 통화 내역을 고스란히 보여 주기도 한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록되어 있는 통화 시간은 한 시간인데 대화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고, 3분 미만의 통화 내역이 같은 번호로만 열 번 넘게 찍혀 있을 수도 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발신’내역일 수도 있다. 당신의 말은 이미 지구를 벗어나 있고, 당신은 여기 지구에 남겨져 있는 어색한 상황. 그때의 억울함은 기억을 ‘흘린’ 것이 아니라 ‘도난 당한’ 것 같은 기분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휴대폰을 손에 쥐고 노려보거나, 집어 던지거나, 종료 버튼을 꾹 누르거나, 여기저기 문자 메시지를 보내 휴대폰을 과로사 시키려고 해 봐도 이미 엎질러진 물. 공범처럼, 혹은 주모자처럼 느껴지더라도 실제 휴대폰은 증인이나 범행 도구 정도일 뿐, 형을 언도받는 것은 당신이다.
⠀당신이 술을 먹고 해서는 안 될 전화를 하는 것은 알코올이 세로토닌을 죽이기 때문이다. 세로토닌이 죽으면 기분이 가라앉거나 지나치게 들뜨고 우울해지고 외로워진다. 알코올은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전두염을 건드린다. 알코올은 측두엽의 해마를 건드린다. 해마 안의 기억 입력 장치가 고장 나면, 당신의 끊어진 필름은 후에 최면을 건다 해도 재생되지 않는다. 입력조차 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끊어진 필름을 친구나 애인, 가족, 혹은 직장 동료가 보관하는 것보다는 전문적으로 폐기 처분해 주는 곳에 맡기는 것이 어떤가. 그런 점에서 해마005는 당신에게 유용할 수 있다. 당신이 이곳에 소비한 시간은 통화가 종료되면 동시에 사라진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해마005는 음주 통화를 위해 열려 있는 전화번호다.
말이 통하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발신인과 수신인이 확실하고, 두 사람이 입과 귀를 상대방을 향해 열고 있다면 대화는 이루어진다. 1분에 1,500원씩, 거의 해외 로밍 수준의 요금이 부과되지만 사람들이 초 단위로 계산되는 시간을 기꺼이 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알코올 농도를 체온처럼 유지하기 위해 성실하게 알코올을 주입하는 사람들, 그렇게 적정 알코올 농도를 지키는 사람들, 당신들이 이 밤을 견디는 법은 세 가지다.
⠀마시거나, 잠들거나, 말하거나.

#해마날다 #윤고은 #이효석문학상수상작
#문학의숲
photo by #NanGol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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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동기를 유추할 수 없는 일이 제법 되지. 자네 성경을 읽어본 적 있어?“ ⠀”종교 없습니다.“ ⠀”아이 때문에 아내가 하도 성화해서 교회에 잠시 다녔어. 나더러 기도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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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는 동기를 유추할 수 없는 일이 제법 되지. 자네 성경을 읽어본 적 있어?“ ⠀”종교 없습니다.“ ⠀”아이 때문에 아내가 하도 성화해서 교회에 잠시 다녔어. 나더러 기도라도 하라는 거야.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다고. 기도로 아이가 낫는 건 아니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니지 싶어서 따라갔지. 찬송도 모르고 설교도 재미없으니까 예배 시간이면 할 일 없어 멀뚱히 앉아 있다가 성경을 조금씩 읽었어. 『마태복음』 8장에 이런 구절이 있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계속 곱씹었어. 예수는 인자하고 자비롭다면서 ...
⠀”세상에는 동기를 유추할 수 없는 일이 제법 되지. 자네 성경을 읽어본 적 있어?“
⠀”종교 없습니다.“
⠀”아이 때문에 아내가 하도 성화해서 교회에 잠시 다녔어. 나더러 기도라도 하라는 거야.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다고. 기도로 아이가 낫는 건 아니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니지 싶어서 따라갔지. 찬송도 모르고 설교도 재미없으니까 예배 시간이면 할 일 없어 멀뚱히 앉아 있다가 성경을 조금씩 읽었어. 『마태복음』 8장에 이런 구절이 있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계속 곱씹었어. 예수는 인자하고 자비롭다면서 죽은 사람한테 왜 이러나, 사람이 죽었는데 이렇게 야박해도 되나... 이해할 수 없었지. 한참 새기니까 조금 알 것도 같더라고.“
⠀”무슨 뜻인데요?“
⠀”영혼이 죽은 자는 내게 필요 없다. 불신자는 불신자에게 가고 믿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나를 따르는 건 믿는 자로 충분하다는 뜻이려나.“

#편혜영 , #죽은자로하여금
#현대문학
photo by #BrianJ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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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뭐겠어?“ ”아랫사람 갈구면서 지시대로 열심히 수행하는 거죠.“ ⠀무주는 뜨끔했다.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무주는 실상 스스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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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뭐겠어?“ ”아랫사람 갈구면서 지시대로 열심히 수행하는 거죠.“ ⠀무주는 뜨끔했다.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무주는 실상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것도 방법이지. 아님 천재가 돼야지. 군말을 듣지 않으려면 탁월해지면 되거든.“ ⠀”천재는 아무나 되나요.“ ⠀”그래서 보통은 타락하는 쪽을 택하지.“ ⠀무주는 당황했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이석은 무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석 자신의 얘기이기도 했다. 무주가 자신과 별다를 바 없음을 알아채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무주는 이석의 ...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뭐겠어?“ ”아랫사람 갈구면서 지시대로 열심히 수행하는 거죠.“
⠀무주는 뜨끔했다.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무주는 실상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것도 방법이지. 아님 천재가 돼야지. 군말을 듣지 않으려면 탁월해지면 되거든.“
⠀”천재는 아무나 되나요.“
⠀”그래서 보통은 타락하는 쪽을 택하지.“
⠀무주는 당황했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이석은 무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석 자신의 얘기이기도 했다. 무주가 자신과 별다를 바 없음을 알아채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무주는 이석의 가느다란 눈을 피하려고 분위기를 돌릴 화제를 찾았다. 문득 헤파린 사건이 떠올랐다. 마침 오늘 새벽에 효에게 그런 얘기를 들어서였다.
⠀”병원에 사고가 있었어요.“
⠀무주는 보관실에 있던 수액 주머니에 다른 약물이 주입되어 있었다고 얘기했다.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인슐린이 과하게 주입되었을 경우 일어나는 신체 반응을 덧붙였다. 얘기를 다 하고 나서야 잠자코 듣고 있는 이석이 종종 야매 약사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간호조무사 시절 그 약품을 다뤄본 적 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짐작대로 이석은 무주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고 되물었다.
⠀”누군가 일부러 약물을 주입했다는 거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환자를 죽이려고?“
⠀”그러면 치사량을 썼겠죠.“
⠀”그것도 아니라면 왜?“
⠀”그거야 모르죠.“
⠀”유감이지만 투약 실수는 흔한 일이야.“
⠀”현미경으로 봐야만 보이는 주사 자국이 있답니다. 플라스틱으로 된 주머니 입구에 구멍이 뚫렸대요. 열 개나 뚫린 것도 있고요. 생각해보세요. 약병인데 무슨 코르크처럼 구멍이 뚫렸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지? 누거 죽었나?“
⠀”환자들은 괜찮아졌어요. 다행이죠. 응급처치가 빨라서 별 탈 없었죠. 그래도 진상을 조사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원장은 잠자코 있었어요. 사무장은 문제 삼지 말라고 윽박질렀고요.“
⠀”결국 아무 일도 없었잖아. 담당 의사하고 간호사, 당직 의사가 고생했을 테지만, 그게 다잖아.“
⠀”진상 규명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죠.“
⠀”바람직한 소리야.“
⠀”그런 일이 생긴 것도 사과해야 하고요.“
⠀”옳은 말만 하는군. 하지만 누구한테 사과하라는 거지? 죽다 살아난 환자한테? 환자를 살리느라 애쓴 의료진한테? 그런 일을 겪게 한 직원들한테?“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조사는 해야죠.“
⠀”의료사고가 났다고 동네방네 떠들었어야 하는군.“
⠀”누가 그랬는지 잡아야죠.“
⠀”이럴 때 형사들은 보통 동기를 찾던데. 동기가 있는 사람이 범인이잖아.“
⠀”그러니까 조사를 했어야죠.“
⠀”동기를 찾는 방법은 간단해. 누가 그 일로 이익을 봤는지 따져야지.“
⠀그 말을 듣자마자 무주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석에 대한 무주의 글이 삭제된 직후 그 일이 터졌다. 결과적으로 이석의 비리는 단숨에 묻혔다. 화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곧이어 아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석은 동정을 샀다. 게시판에 올렸던 내용이 일부 알려진 모양이지만 사람들은 이석의 비리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치부했다.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누군가 죽으면 그런 일이 흔히 벌어졌다. 사람들이 이석에게 느끼는 호의에는 확실히 동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석의 동기를 산발적으로 추측하는 것은 죄책감을 덜려는 노력에 불과했다. 이석이 무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주는 웃으려 애썼다. 잘 되지 않았다. 이석이 다시 돌아온 건 그에게 탓할 일이 없다는 뜻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승진이야말로 이석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실질적인 증거였다. 이석은 관행에 따라 한 푼도 챙기지 않고 믿음직한 누군가에게 모두 건네줬을 것이다.
⠀문제가 불거졌을 때 무주는 버려졌지만 이석은 살아남았다. 다시 기회를 얻었다. 그게 잘못이 없다는 건지, 쓸모가 남앗다는 의미인지 헛갈렸다.
⠀”뭘 그렇게 오래 생각해? 누구긴 누구겠어. 새로 계약한 약품업자겠지. 약품업자를 바꿨을 거 아니야.“
⠀그랬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영원사원이 거래처 한 곳 늘리자고 위험한 짓을 벌엿다고 추측하기는 힘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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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 틈만 나면 이석 얘기를 꺼냈다. ”그 집 아이 알죠? 자그마치 3년이야. 틈만 나면 밖에서 놀고 축구만 하던 아이가 3년째 꼼짝않고 기계에 매달려 누워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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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 틈만 나면 이석 얘기를 꺼냈다. ”그 집 아이 알죠? 자그마치 3년이야. 틈만 나면 밖에서 놀고 축구만 하던 아이가 3년째 꼼짝않고 기계에 매달려 누워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이석이 그간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요? 그 사람 입고 다니는 옷 봤어요? 하도 사람꼴이 아니어서 작년 가을에 내가 시장에서 사준겁니다. 돈 몇 푼 챙겼을 수도 있죠. 그거 몇 푼 챙길 때 그 사람 마음이 어땠겠어요? 그게 사람 마음이었겠어요? 어떻게 사람이 돼서 그런 것도 몰라요?“ ⠀이석의 아이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무주는 아내를 재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내가 아니라 ... ⠀김은 틈만 나면 이석 얘기를 꺼냈다.
”그 집 아이 알죠? 자그마치 3년이야. 틈만 나면 밖에서 놀고 축구만 하던 아이가 3년째 꼼짝않고 기계에 매달려 누워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이석이 그간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요? 그 사람 입고 다니는 옷 봤어요? 하도 사람꼴이 아니어서 작년 가을에 내가 시장에서 사준겁니다. 돈 몇 푼 챙겼을 수도 있죠. 그거 몇 푼 챙길 때 그 사람 마음이 어땠겠어요? 그게 사람 마음이었겠어요? 어떻게 사람이 돼서 그런 것도 몰라요?“
⠀이석의 아이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무주는 아내를 재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내가 아니라 배 속 아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 같아서였다. 아이를 떠올리면 세상의 어떤 아비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자식의 숨을 거둬들이지 않으리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무주 씨 아내도 임신했잖아. 병원에 올 때마다 자리 비우고 산부인과 가죠? 진료 끝날 때까지 기다리죠? 그거 근무 태만이죠. 선택 진룐데 원무과에서 일반 진료로 처리했죠? 직원이기 때문에 예약에 편의를 봐줬죠? 그것도 비립니다. 자기 아이는 끔찍하면서 남의 아이는 신경도 안 쓰입니까?“
⠀”신경 쓰입니다.“
⠀허구헌 날 김의 얘기를 듣다 지친 무주가 불쑥 대꾸했다. 김이 움찔했다.
⠀”고작 몇 푼 챙긴 게 아닙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몇 년간 꾸준히 챙겼어요.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다면 서울 외곽에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는 돈이었다고요.“
⠀”그래서 그 아파트는 지금 어디 있나요?“
⠀”조심합시다.“
⠀무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자리에 앉아 잇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빼들고 무주를 쳐다봤다.
⠀"뭘요? 뭘 조심합니까?”
⠀켕기는 얼굴로 곧바로 김이 되물었다. 무주는 김이 조금 순해졌다가, 무주의 눈치를 살피다가, 잠자코 있는 무주를 보고 언뜻 안도감도 내비쳤다가 다시 의기양양해지는 것을 죄다 지켜보고 있었다.
⠀조심하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괴한 말이었다. 하지만 무주는 자신이 왜 그 말을 했는지 잘 알았다. 본래 동상 든 손은 눈 속에 파묻어야 다시 피가 돈다고 하지 않는가. 무주는 수모를 감수하느니 모든 일을 아는 듯 굴기로 했다.
⠀“제가 입을 열면 많이 다칠 겁니다.”
⠀“이번엔 누가 다쳐요?”
⠀앞자리의 송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무주를 언제나 “양수 씨”라 부르며 한 번도 동료 취급해준 적 없는 사람, 송을 똑바로 보며 무주가 싸늘하게 말했다.
⠀“조심해요.”
⠀송은 어이없이 웃으면서도 무주에게서 금세 눈을 돌렸다.
⠀사무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송은 일에 몰두하는 척했다. 무주는 이제 누군가를 직접 비방하지 않고도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김은 무주를 더는 불러 세우지 않았다. 반말로 닦달하는 일도 관뒀다. 무주에게 다가와 이석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보는 사람도 사라졌다. 간혹 무주에게 다가와 입을 열면 도대체 누가 다치느냐고 목소리를 낮춰 묻는 사람이 생기기는 했다. 무주는 결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아는게 없어서였다.
⠀자존심은 지켰지만 외로워졌다. 동료들이 노골적으로 무주를 피했다. 그럴수록 무주는 자주 중얼거렸다.
⠀조심해요.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모두 좋지 않은 것뿐이었다.
⠀아내가 유산을 했다.

#편혜영 , #죽은자로하여금
#현대문학
photo by #LukaszWierzbow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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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험에 든다는 것. 그 말은 위기에 빠진다는 의미였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교회에 다니며 그말을 자주 들었다. 어른들은 곧잘 힘든 일을 겪지않게 해달라는 의미로 ‘시험에 들게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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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험에 든다는 것. 그 말은 위기에 빠진다는 의미였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교회에 다니며 그말을 자주 들었다. 어른들은 곧잘 힘든 일을 겪지않게 해달라는 의미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위기에 처해 신을 저버리지 않게 해달라는 간곡한 당부이거나 미혹한 스스로를 다짐하며 쓰는 말이었다. 성장한 후 무주는 교회에 나간 적이 없지만 누구를 향해서건 무턱대고 기도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시험에 든 이상 그런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

⠀시험에 든다는 것. 그 말은 위기에 빠진다는 의미였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교회에 다니며 그말을 자주 들었다. 어른들은 곧잘 힘든 일을 겪지않게 해달라는 의미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위기에 처해 신을 저버리지 않게 해달라는 간곡한 당부이거나 미혹한 스스로를 다짐하며 쓰는 말이었다. 성장한 후 무주는 교회에 나간 적이 없지만 누구를 향해서건 무턱대고 기도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시험에 든 이상 그런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점에서 셰계는 애초 구球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야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회계장부의 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날마다의 정산에 문제가 없었다. 주간 단위 정산에도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월간 정산이나 연간 정산도 틀림없었다. 숫자의 균형만 따지면 어느 것 하나 트집 잡을 게 없었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찍혀 있는 콤마처럼 질서 정연하고 하자 없이 반듯했다.
⠀상식을 대입하자 결과가 달라졌다. 예를 들어 업무용 컴퓨터 가격이 그랬다.

(중략)

컴퓨터 이외에 다른 품목들도 모두 대조해보자 금액이 불어났다. 티슈를 구입할 때에도 얼마간 차액이 불어났다. 약품 항목에 있어서는 엄청났다. 거의 모든 약품의 구매 단가가 높게 챙정되어 있었다. 차액은 말할 것도 없이 리베이트였다.
⠀이 기만적인 숫자에 어떤 진실이란 게 있다면 누구나 알아차리기 쉽게 일관성을 갖고 부풀려졌다는 점이었다. 누구든 공들여 장부를 들여다보기만 하면 알아냈으리라는 얘기이다. 이제껏 그럴 기회가 없어서 들통나지 않았을 뿐이다. 증빙을 모으고 업체를 추렸다. 내부 담당자가 누구인지 명확해졌다. 무주는 그제야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싶어졌다.
⠀부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이석은 무주의 업무를 봐줄 때마다 시련이란 닥치게 되어 있으므로 그런 일이 생기면 자신을 찾으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실제로 도움을 청할 때면 언제나 도와주었지만 정작 가장 큰 시련 앞에서는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바로 이석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보고일이 다가올수록 무주는 자신이 이런 일에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석의 월급과 지출을 감안하면 숨이 턱 막혔다. 서울의 병원에 있는 이석의 아이와 이석 아내의 사력을 다한 간호를 떠올리면 죄책감이 들었다. 이 일로 이석이나 아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심하게 자책할 것 같았다.
⠀동시에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사로잡힌 생각, 세상이 나아져야 한다는 신념도 떠올랐다. 확실히 무주는 순도 높은 정의감과 도덕심에 홀려있었다. 다시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신념 때문만이 아니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받는 게 두려웠다.

#편혜영 , #죽은자로하여금
#현대문학
photo by #AnnaLla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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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어쩌끄나, 내가 서른살에 막둥이 너를 낳았는디. 나는 타고나기를 왼쪽 젖꼭지 모양이 이상해서, 느이 형들은 잘 나오는 오른쪽 젖만 빨았는디. 내 왼쪽 젖은 퉁퉁 붓기만 하고 애기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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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어쩌끄나, 내가 서른살에 막둥이 너를 낳았는디. 나는 타고나기를 왼쪽 젖꼭지 모양이 이상해서, 느이 형들은 잘 나오는 오른쪽 젖만 빨았는디. 내 왼쪽 젖은 퉁퉁 붓기만 하고 애기들이 빨지 않아서, 보드라운 오른쪽 젖하고 딴판으로 단단해져버렸는디. 그렇게 흉한 짝젖으로 여러해를 살었는디. 허지만 너는 달랐는디. 왼쪽 젖을 물리면 물리는 대로, 이상하게 생긴 젖꼭지를 순하디순하게 빨아주었는디. 그래서 두 젖이 똑같이 보드랍게 늘어졌는디. 어쩌끄나, 젖먹이 적에 너는 유난히 방긋 웃기를 잘했는디. 향긋한 노란 똥을 베 기저귀에 누었는디. 그러다 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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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끄나, 내가 서른살에 막둥이 너를 낳았는디. 나는 타고나기를 왼쪽 젖꼭지 모양이 이상해서, 느이 형들은 잘 나오는 오른쪽 젖만 빨았는디. 내 왼쪽 젖은 퉁퉁 붓기만 하고 애기들이 빨지 않아서, 보드라운 오른쪽 젖하고 딴판으로 단단해져버렸는디. 그렇게 흉한 짝젖으로 여러해를 살었는디. 허지만 너는 달랐는디. 왼쪽 젖을 물리면 물리는 대로, 이상하게 생긴 젖꼭지를 순하디순하게 빨아주었는디. 그래서 두 젖이 똑같이 보드랍게 늘어졌는디. 어쩌끄나, 젖먹이 적에 너는 유난히 방긋 웃기를 잘했는디. 향긋한 노란 똥을 베 기저귀에 누었는디. 그러다 열이 나면 얼굴이 푸레지고, 경기를 함스로 시큼한 젖을 내 가슴에다 토했는디. 어쩌끄나, 젖을 뗄 적에 너는 손톱이 종이맨이로 얇아질 때까지 엄지손가락을 빨았는디. 온나, 이리 온나, 손뼉 치는 내 앞으로 한발 두발 걸음마를 떼었는디. 웃음을 물고 일곱걸음을 걸어 나헌테 안겼는디. 여덟살 묵었을 때 네가 그랬는디.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 암것도 아닌 그 말이 좋아서 나는 네가 시인이 될라는가, 속으로 생각했는디. 여름밤 마당 평상에서 느이 아부지하고 삼형제하고 같이 수박을 먹을 적에. 입가에 묻은 끈끈하고 다디단 수박물을 네가 혀로 더듬어 핥을 적에.

*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놧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가을비가 지나가서 하늘이 유난히 말간 날엔 잠바 속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무릎을 짚음스로 절름절름 천변으로 내려간다이. 코스모스가 색색깔로 피어 있는 길,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죽은 지렁이들에 쇠파리가 꾀는 길을 싸묵싸묵 걷는다이. 네가 여섯살, 일곱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먼 너는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제.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한강 #소년이온다 <꽃 핀 쪽으로>
#창비
photo by #MasaoYamam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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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또 생각했다. 이렇게 달리는 거다. 달리고 달리다보면 언젠가 모든 거리의 모든 밤을 가로질러 결국 불이 켜진 집에 가 닿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도둑이 들까봐 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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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또 생각했다. 이렇게 달리는 거다. 달리고 달리다보면 언젠가 모든 거리의 모든 밤을 가로질러 결국 불이 켜진 집에 가 닿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도둑이 들까봐 불을 켜놓은 빈 집이 아니라 정말 누군가가 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불 켜진 집. 그리고 그것은 이 밤의 끝까지라도 달려 도망쳐야 할 것만 같던 내가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발을 멈춰도 되는, 이 세상의 가장 멋진 풍경. ⠀ 태수는 내가 자기 집 아파트 단지 앞에서 돌아간 줄 알지만 나는 더 멀리까지 갔었다. ⠀왜 마음이 아프고 슬퍼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눈물이 솟구치는 게 느껴지자마자 ...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또 생각했다. 이렇게 달리는 거다. 달리고 달리다보면 언젠가 모든 거리의 모든 밤을 가로질러 결국 불이 켜진 집에 가 닿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도둑이 들까봐 불을 켜놓은 빈 집이 아니라 정말 누군가가 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불 켜진 집. 그리고 그것은 이 밤의 끝까지라도 달려 도망쳐야 할 것만 같던 내가 마침내 지칠 대로 지친 발을 멈춰도 되는, 이 세상의 가장 멋진 풍경.
⠀ 태수는 내가 자기 집 아파트 단지 앞에서 돌아간 줄 알지만 나는 더 멀리까지 갔었다.
⠀왜 마음이 아프고 슬퍼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눈물이 솟구치는 게 느껴지자마자 반사적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고 참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무도 없는 한밤중, 이 거리에 나 혼자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혼자 달리고 있었다. 잎을 접고 잠든 가로수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쳐가며. 이따금 곁을 스쳐가는 자동차의 피로해 보이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씩 내 얼굴을 비췄을 뿐. 배에 힘을 풀자마자 동시에 눈물 한 줄기가 툭, 떨어졌다. 그때부터는 걸었다.

#은희경 #소년을위로해줘
#문학동네
photo by #LiHu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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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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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 ⠀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
⠀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 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류근 #祝詩 #어떻게든이별
#문학과지성시인선
photo by #DingR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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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vie #熱血男兒(1987) #AsTearsGoBy Song #Alvvays - Archie, Marry Me edit by #imcybogbutthats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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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vie #熱血男兒(1987) #AsTearsGoBy Song #Alvvays - Archie, Marry Me edit by #imcybogbutthatsok


Movie #熱血男兒(1987) #AsTearsGoBy
Song #Alvvays - Archie, Marry Me
edit by #imcybogbutthatsok
⠀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길고 좁고 어두운 길에 사람이 엉켜 있었다 포옹인지 클린치인지 알 수 없었다 둘러 갈 길 없었다 나는 이어폰 빼고 발소리를 죽였다 팔꿈치를 벽에 대고 한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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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길고 좁고 어두운 길에 사람이 엉켜 있었다 포옹인지 클린치인지 알 수 없었다 둘러 갈 길 없었다 나는 이어폰 빼고 발소리를 죽였다 팔꿈치를 벽에 대고 한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야 너무하잖아 지나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자 누구 말이 맞는지 가려보자며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멈칫 둘러보니 행인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난 긴장하며 고개 숙여 기다렸다 이 순간 내가 저들의 생에 중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나 보다 원투 스트레이트 촌각의 글러브가 심장을 쳤다 가로등 밑에서 편지를 읽던 밤이 떠올랐다 달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렇게 씌어 있던 우린 이어지지 않았다 그 ...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길고 좁고 어두운 길에 사람이 엉켜 있었다 포옹인지 클린치인지 알 수 없었다 둘러 갈 길 없었다 나는 이어폰 빼고 발소리를 죽였다 팔꿈치를 벽에 대고 한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야 너무하잖아 지나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자 누구 말이 맞는지 가려보자며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멈칫 둘러보니 행인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난 긴장하며 고개 숙여 기다렸다 이 순간 내가 저들의 생에 중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나 보다 원투 스트레이트 촌각의 글러브가 심장을 쳤다 가로등 밑에서 편지를 읽던 밤이 떠올랐다 달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렇게 씌어 있던 우린 이어지지 않았다 그 젊은 연인들은 나한테 접근하다가 둘의 그림자만 거죽처럼 흘리고 갔다 얘들아 나도 불가피하게 사람인데 너무한 거 아니니 그들이 사라져 간 골목 끝에서 나는 신보다 고독했다

#김이듬 #밤의거리에서혼자 『표류하는 흑발』
#민음사
photo by #MariyaNovak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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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빛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불빛 속에 손을 넣어 둥근 반찬통을 꺼내다 말고 저 불빛들, 다 길이다. 중얼거린다. 저녁이 산을 가만히 지우는 동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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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빛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불빛 속에 손을 넣어 둥근 반찬통을 꺼내다 말고 저 불빛들, 다 길이다. 중얼거린다. 저녁이 산을 가만히 지우는 동안 나는 아무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불빛에 기대면 그늘이 된다, 어둠이 된다. 여긴 마치 물속의 방 같아서 애초 바닥 따윈 없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두려움 따위는 집어치웠던 시절, 몸에 긴 칼자국을 그리던 겨울. 깜박거리던 불빛 같은 핏방울로 달빛조차 붉어 보이던 창문으로 달이 지난 지 오래. 아무것도 소곤거리지 않는 참으로 편안했던 불안. ⠀ ⠀불빛에 부풀려진 ...
불빛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불빛 속에 손을 넣어 둥근 반찬통을 꺼내다 말고 저 불빛들, 다 길이다. 중얼거린다. 저녁이 산을 가만히 지우는 동안 나는 아무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불빛에 기대면 그늘이 된다, 어둠이 된다. 여긴 마치 물속의 방 같아서 애초 바닥 따윈 없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두려움 따위는 집어치웠던 시절, 몸에 긴 칼자국을 그리던 겨울. 깜박거리던 불빛 같은 핏방울로 달빛조차 붉어 보이던 창문으로 달이 지난 지 오래. 아무것도 소곤거리지 않는 참으로 편안했던 불안.

⠀불빛에 부풀려진 영혼은 밤새 공중을 떠다니고
⠀달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던 어느 날 붉고 동그랗던 불빛을 기억한다.
⠀그 불빛들
⠀나무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물방울처럼 흘러내렸고
⠀아직도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앉은 시절.

⠀남은 반찬을 냉장고 속에 넣고, 불을 켠다. 깨알 같은 글자들로 가득한, 채송화 꽃씨보다 작고 작은 글자들이 무료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비친다. 한 시절이 가서 다시 오지 않았다.
#이승희 #시절,불빛
#문학동네시인선
photo by #陈宇学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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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간혹 지금 헤매는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득하게 있어 급한 마음엔 한 가닥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젠 되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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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간혹 지금 헤매는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득하게 있어 급한 마음엔 한 가닥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를 받으며 ⠀ ⠀ #이성복 #편지5 photo by #MINSYUANWANG ⠀ ⠀ @minimanimo_library
늘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간혹 지금 헤매는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득하게 있어 급한 마음엔 한 가닥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를 받으며 ⠀

#이성복 #편지5
photo by #MINSYUAN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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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동안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후에야 동생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면 상황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정반대더군요. 디에고에게는 골치 아픈 상황이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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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동안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후에야 동생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면 상황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정반대더군요. 디에고에게는 골치 아픈 상황이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끔찍합니다. 너무나 불행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동안이지만 디에고는 나보다 동생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내가 양보해야 하겠지요. 다 알지만 너무 힘들어요. 내가 얼마나 힘들지 모르실 겁니다.』⠀ ⠀ ⠀ ⠀“희망은 마음의 암이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
『몇 달 동안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 후에야 동생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면 상황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정반대더군요. 디에고에게는 골치 아픈 상황이 좀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끔찍합니다. 너무나 불행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동안이지만 디에고는 나보다 동생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내가 양보해야 하겠지요. 다 알지만 너무 힘들어요. 내가 얼마나 힘들지 모르실 겁니다.』⠀

⠀ ⠀“희망은 마음의 암이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단편 <밀물>을 읽다 이 문장에 넘어졌다. 요란하게 고꾸라진 게 아니라 풀쑥, 무릎이 꺾여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많고 많은 희망! 도처에 날아다니는, 잡을 수 없는 깃발, 오지 않는 고도(베케트).
길게 봤을 때, ‘당신의 배신’보다 힘든 것이 희망이다. 괜찮아질 거라고, 돌아올 거라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

⠀ ⠀희망은 ‘기대’와 단짝이다. 기대는 ‘실망’과 단짝이다. ‘실망’은 ‘절망’과 단짝이다. ‘절망’은 ‘고통’과 단짝이다. ‘고통’은 ‘아픔’과 단짝이다. ‘아픔’은 ‘슬픔’과 단짝이다. ‘슬픔’은 ‘비극’과 단짝이다. ‘비극’은 ‘파멸’과 단짝이다. ‘파멸’은 ‘죽음’과 단짝이다. ‘죽음’은 ‘소멸’과 단짝이다.
⠀ ⠀결국 희망은 존재의 소멸을 불러온다. 그러니 희망은 마음의 암, 맞다.
⠀ ⠀


희망 — 기대
⠀ ⠀ ⠀ ⠀ │
⠀ ⠀ ⠀ ⠀실망 ─ 절망
⠀ ⠀ ⠀ ⠀ ⠀ ⠀ ⠀ ⠀ │
⠀ ⠀ ⠀ ⠀ ⠀ ⠀ ⠀ ⠀고통 ─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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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슬픔 ─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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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 ⠀파멸 ─ 죽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소멸


⠀ ⠀하늘 복판에서 바라보는 눈은 어떨까?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헤매는 것처럼 보일까? 사랑의 복판에서 바라보면 배신도 사랑의 한 형태리라. 뜨거웠던 물이 식어빠지는 동안 허공으로 증발하는 물, 물, 물,

⠀ ⠀예수를 밀고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룟 유다의 숙인 목덜미에도 피는 돌았으리라. 흔들리지 않아서 귀한 게 아니라, 흔들리며 괴로워한 적 있으므로 희망은 귀하다. 얇아지다 돌연 두꺼워지는 희망, 눈은 계속 내릴 것이다. 희망이 계속 자라듯, 누군가는 뜨겁고, 누군가는 차가워지면서 세상의 모든 연인들은 생기고 사라지리라.

⠀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만 배신이 아니다. 당신이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찢어진 상처를 들여다보기를 ‘거부’하는 게 배신이다. 상처 입을 것을 알고도 상처를 주는 것. 칼을 자유자재로 꺾어 찌르는 것. 쑤시고, 쑤시고, 쑤셔서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외상을, 또 내상을 입히는 것. 감정을 함부로 휠체어에 태우는 것.

⠀ ⠀배신은 감정이입의 실패다. 당신과 내가 합체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것. 당신이 나를 배신했을 때, 내 감정이 자주 휠체어에 올라타던 게 특히, 싫었다. 그것은 불구의 나라서 함부로 혼낼 수도, 일어서라 할 수도 없었다.

#박연준 #밤은길고괴롭습니다
#알마
photo #fridakah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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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슬픈 꿈을 꾼 적이 있다. 잠이 깨고 난 뒤에도 암담함이 사라자지 않았다. 잠자리에서 빠져나왔을 때 언제 깼는지 다섯 살 딸아이가 나를 따라 나왔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만 아이 앞에서 울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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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슬픈 꿈을 꾼 적이 있다. 잠이 깨고 난 뒤에도 암담함이 사라자지 않았다. 잠자리에서 빠져나왔을 때 언제 깼는지 다섯 살 딸아이가 나를 따라 나왔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만 아이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우는 나를 아이가 곁에서 지켜보고 서 있었다. “놀랬지?” 눈물을 멈추고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너무 슬픈 꿈을 꿔서 가슴에 남은 슬픔을 날려 보내려고 운 거야.” “무슨 슬픈 꿈?” 아이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내가 죽는 꿈이었어?”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너도 누가 죽는 꿈을 꾼 적 있어?” 나는 놀라서 ... 언젠가 슬픈 꿈을 꾼 적이 있다. 잠이 깨고 난 뒤에도 암담함이 사라자지 않았다. 잠자리에서 빠져나왔을 때 언제 깼는지 다섯 살 딸아이가 나를 따라 나왔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만 아이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우는 나를 아이가 곁에서 지켜보고 서 있었다.
“놀랬지?”
눈물을 멈추고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너무 슬픈 꿈을 꿔서 가슴에 남은 슬픔을 날려 보내려고 운 거야.”
“무슨 슬픈 꿈?”
아이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내가 죽는 꿈이었어?”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너도 누가 죽는 꿈을 꾼 적 있어?”
나는 놀라서 물었다.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 라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엄마가 아플 때.”
“그때 엄마가 죽는 꿈을 꾼 거야?”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컸을 때 엄마가 죽었어.. 꿈에서.”
나는 아이를 당겨 안으며 슬펐겠네, 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엄마는 절대 죽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아니 별루. 괜찮아.”
아이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딸아이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언젠가는 닥칠 엄마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엄마가 죽으면 자신의 꿈 때문일지 모른다는 자책의 얼굴. 그 얼굴이 아주 오래 마음에 남아서 이 소설을 쓰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선 전화를 받은 게 11월 초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오래전부터 예정된 여행이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책을 낸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내가 제대로 해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편집자가 전화를 했다. 나는 고치고 있다고,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빚 독촉을 받는 채무자처럼 말했다.
편집자는 아주 조심스럽게 심사를 보셨던 이상운 선생님께서 고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처음부터 내 작품에 확신을 가져다주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비로소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밤새웠던 수백 일의 날들, 내가 해미가 되고 해미가 내가 되어 울고 웃던 순간들, 내 미숙함과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고민한 시간들, 잠을 자다 말고 일어나서 남편에게 어깨를 주무르라고 울며 소리치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맘껏 기뻐하기도 전에 지금 그분이 세상에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이 선생의 발인이었다. 편집자도 나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정이 복잡했다. 무엇보다 내 작품에 확신을 가져주셨던 분들께 부끄럽고 감사했다. 조심스럽지만 그분이 세상에 남기신 마지막 말로 수상 소감을 대신하고 싶다.

태어나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 수고로움에 대해 박수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글을 쓰는 일이나, 살아가는 일이나, 그 자체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고, 모두 격려와 위로를 받아야 할 뿐이다.

#수상소감 #소각의여왕,이유
#제21회문학동네소설상
photo by #EmmaKat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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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겨울 바다, 껍질로 출렁이는 밤⠀ ⠀ ⠀ 겨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혹독한 계절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추위가 지나가길 묵묵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잎을 다 떨어뜨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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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겨울 바다, 껍질로 출렁이는 밤⠀ ⠀ ⠀ 겨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혹독한 계절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추위가 지나가길 묵묵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잎을 다 떨어뜨려 황량해진 겨울나무들도 맨몸으로 서서 기다린다. 곤충들 중에는 알이나 고치 속에 들어가 긴 겨울을 버티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 ⠀기다리는 것에 심취해 있는 것들은 자신이 무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오래 기다리다보면, 혜안을 갖게 되거나변태할지도 모른다고, 저기 기다림의 고수가 오고 있다. 나이를 가늠할 ...

2. 겨울 바다, 껍질로 출렁이는 밤⠀

⠀ 겨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혹독한 계절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추위가 지나가길 묵묵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잎을 다 떨어뜨려 황량해진 겨울나무들도 맨몸으로 서서 기다린다. 곤충들 중에는 알이나 고치 속에 들어가 긴 겨울을 버티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 ⠀기다리는 것에 심취해 있는 것들은 자신이 무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오래 기다리다보면, 혜안을 갖게 되거나변태할지도 모른다고, 저기 기다림의 고수가 오고 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속눈썹 끝까지 꼼꼼히 늙은 겨울 바다 한 채가 온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노련한 구두를 신고, 지혜의 열쇠를 주러 오고 있다.
⠀ ⠀이렇게 일렁이는 종이는 처음이다. 놀랄 일도 아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겨울 바다 한 장이니까. 바다 위에 글을 쓰려면 손가락들의 멀미를 각오해야 한다. 조금 천천히 써야 할 것이다.
⠀ 봄 바다, 여름 바다, 가을 바다가 실컷 뒤척이고 일어서고 달리고 사랑하다 몸 벗어놓고 어딘가로 사라졌을 때, 그 벗어놓은 껍질이 겨울 바다다. 저 일렁이는 껍질, 큰 핀셋으로 들어올리려 해도 여간해서는 걷어낼 수 없는 커다란 껍질! 시무룩한 표정으로 일렁이는 겨울 바다는 얼마나 캄캄한가, 겨울 바다는 껍질로 출렁이는 밤이다.
⠀ ⠀겨울 바다는 쓸쓸해 보인다. 지난 기억을 품고, 이제 스스로 한껏 늙어 지혜로워진 바다다. 여러 날에 걸쳐 그려져 있다. 바다는 지금보다 더 추운 날을 견디기 위해 잠잠해지기도 하는데, 어쩌면 잠깐씩 죽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이 저리도 불안해하며 바다를 흔들어 깨울 리 없다. 바람은 애절하게, 지친 기색도 없이 바다를 졸라댄다. 바다는 열반에 든 와상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고 있을 뿐,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래 뒤척이다 잠깐 실눈을 뜨기도 하지만, 대체로 입을 꼭 다문 채 일렁인다. 바다가 죽지 않았다는 증거로 그 희미한 미소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 ⠀마음이 고단할 때, 어디 내장 기관 깊숙한 곳에 구멍이라도 하나 뚫린 것처럼 몸 속에서 자꾸 휘파람 소리가 들릴 때, 겨울 바다에 가고 싶어진다. 가서 속에 고여 있는 온갖 찌거기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휙, 던지고 싶다. 바다는 넙죽넙죽 폐기된 마음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투정하지 않을 것이다. 엎질러진 머리칼들이 시원하게 뺨을 때려줄 때, 뺨이 투명한 생채기로 물들 때,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때론 말없이 그저 고요하게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정말 고마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바다는 날마다 새로운 귀를 준비하고. 밤마다 무거워진 귀를 털어내는 고단한 작업을 하면서도 한 번도 찡그리지 않는다.


3. 수평선처럼 길게 누워 흘러가는 일

⠀ ⠀우리는 저마다 작은 바다를 가지고 있다. 내 몸에 작은 바다가 살고 있음을. 그리하여 본능적으로 큰 바다와 함께 흐르고 싶어함을 알겠다. 감정이 격해질 때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 눈물이 짠 이유도 모두 바다 때문이다.
⠀ ⠀마음이 크게 휘어질 때나 폭풍처럼 달려가 어디 높은 벼랑에서 아래를 향해 훌쩍 뛰어내리고 싶을 때가 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몸속에 사는 작은 바다가 성이 나 요동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럴 때는 그냥 어디 평평한 곳에 누워 작은 바다가 얌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수평선처럼 길게 누워야 한다. 큰 바다가 합류하여 흘러가는 일을 상상해야 한다. ⠀
#박연준 #소란 <겨울 바다, 껍질>
#북노마드
photo by #Luo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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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님. 저는 지금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제 선택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틀린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어요. 죄책감의 무게는 차오르는 달처럼 점점 무거워지고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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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님. 저는 지금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제 선택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틀린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어요. 죄책감의 무게는 차오르는 달처럼 점점 무거워지고만 있고요. 이 무게를 제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어디로 살짝 옮겨놔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 김 박사님. 김 박사님께서도 어머니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으셨다고 하셨죠? 김 박사님은 어떤 일을 겪으셨나요? 저한테 그 얘기를 해주시면 안 되나요? 김 박사님께서 직접 겪고 이겨내신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는다면, 제 죄책감의 무게도 조금은 줄어들 것만 같아요. 저는 ... 김 박사님.
저는 지금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제 선택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틀린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어요. 죄책감의 무게는 차오르는 달처럼 점점 무거워지고만 있고요. 이 무게를 제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어디로 살짝 옮겨놔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김 박사님.
김 박사님께서도 어머니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으셨다고 하셨죠? 김 박사님은 어떤 일을 겪으셨나요? 저한테 그 얘기를 해주시면 안 되나요? 김 박사님께서 직접 겪고 이겨내신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는다면, 제 죄책감의 무게도 조금은 줄어들 것만 같아요. 저는 이제 임용고시 준비도 깨끗이 포기했어요.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저는 지금 멍하니 김 박사님의 말씀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예요. 분노도, 두려움도 없이, 말하려다 그만두고, 또 말하려다 그만두는 상태. 이런 제가 이해되시나요, 김 박사님?

A:김 박사입니다. 최소연 씨의 상황은 충분히 안타깝지만, 우선 이런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최소연 씨의 죄책감은 어쩌면 거짓된, 위장된 죄책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죄책감은 언제 생기게 되는 걸까요? 그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선택’에 부차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일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이 틀렸거나 그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봤을 때, 그때 우리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는 선택을 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원죄가 생겼듯, 우리는 살아나가는 내내 이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연 씨.
이번 경우는, 결코 최소연 씨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최소연 씨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자면, 그건 어디까지나 부모님 두 분 사이의 문제입니다. 최소연 씨가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최소연 씨가 원인이 된 것은 분명 아닙니다. 최소연 씨가 아버지에게 말을 꺼내게 된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단 하나의 과제였던 것뿐이지요. 그러니, 최소연 씨. 우선 죄책감의 무게부터 덜어내십시오. 그런 다음, 다시 부모님의 문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해의 과정은 그만큼 험난하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넘어가야 할 어떤 부분이기도 합니다. 최소연 시가 하던 일 또한 쉽게 포기하지 마시고, 시간을 갖고 하나하나 문제를 풀어나가시길 바랍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의 과정입니다. 지금 포기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죠. 모두 최소연 씨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김 박사였습니다.

Q: 아니요, 아니요, 김 박사님. 제가 듣고 싶은 것은 그런 말씀이 아니고요. 김 박사님께 있었던 일들, 김 박사님과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일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 거예요. 그때마다 김 박사님은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 술을 마셨는지, 혼자 담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지, 달리기를 하셨는지,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예요. 정말이지 그 이야기들을 듣는다면, 그러면 좀 더 힘이 생길 거 같아요. 말씀드렸잖아요. 저에겐 이제 김 박사님이 유일한 친구이자, 제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 세상 단 한 명뿐인 사람이라고요. 그러니, 김 박사님, 제발, 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에게 지금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안식이랍니다. 김 박사님의 이야기를 기다릴게요.

A:(이제 다들 아셨죠, 김 박사가 누구인지? 자 그럼 어서 빈칸을 채워주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Q: 김 박사님, 김 박사님.. 김 박사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잘 들었어요. 하지만 김 박사님... 이 개새끼야. 정말 네 이야기를 하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네 이야기,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네 이야기 말이야! 나에겐 지금 그게 필요하단 말이야, 김 박사, 이 개새끼야.

#이기호
#김박사는누구인가
#문학과지성사
photo by 微醺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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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낡은 구두에 묻은 눈 몇 송이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은 마음 속에 항시 머무는 먹장구름 우리가 예감할 수 있는 것은 더럽힌 핏줄 더럽힌 자식 兵車는 항시 밥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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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낡은 구두에 묻은 눈 몇 송이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은 마음 속에 항시 머무는 먹장구름 우리가 예감할 수 있는 것은 더럽힌 핏줄 더럽힌 자식 兵車는 항시 밥상을 에워싸고 떠나지 않고 꿈틀거리는 것은, 물결치는 것은 무거운 솜이불 아, 이 겨울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안개 낀 길을 따라 무더기로 지워지는 나무들 우리의 후회는 눈 쌓인 벌판처럼 끝없고 우리의 피로는 죽음에 닿는 江 한 끼도 거름 없이 고통은 우리의 배를 채우고 담배불로 지져도, 얼음판에 비벼도 안 꺼지는 욕정 寶石과 香料로 항문을 채우고서 아, 이 겨울 우리가 이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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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낡은 구두에 묻은 눈 몇 송이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은 마음 속에 항시 머무는 먹장구름
우리가 예감할 수 있는 것은 더럽힌 핏줄 더럽힌 자식
兵車는 항시 밥상을 에워싸고 떠나지 않고 꿈틀거리는 것은, 물결치는 것은
무거운 솜이불 아, 이 겨울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안개 낀 길을 따라 무더기로 지워지는 나무들
우리의 후회는 눈 쌓인 벌판처럼 끝없고 우리의 피로는
죽음에 닿는 江 한 끼도 거름 없이 고통은 우리의 배를
채우고 담배불로 지져도, 얼음판에 비벼도 안 꺼지는 욕정
寶石과 香料로 항문을 채우고서 아, 이 겨울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잠 깬 뒤의 하품, 물 마신 뒤의 목마름
⠀ ⠀ ⠀ ⠀ ⠀ ⠀⠀ ⠀ ⠀ ⠀ ⠀ ⠀⠀ ⠀ ⠀ ⠀ ⠀ ⠀⠀ ⠀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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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언제는 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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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 ⠀ ⠀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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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안 아픈⠀ ⠀ ⠀ ⠀ ⠀ ⠀⠀ 나라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귓속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복숭아꽃⠀ ⠀ ⠀ ⠀ ⠀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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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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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마을이 되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나라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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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갈 수 있을까⠀ ⠀ ⠀ ⠀ ⠀ ⠀
⠀ ⠀ ⠀ ⠀ ⠀ ⠀ ⠀ ⠀ ⠀ ⠀ 어지러움이⠀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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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맑은 물⠀ ⠀ ⠀ ⠀ ⠀ ⠀
⠀ ⠀ ⠀ ⠀ ⠀ ⠀ ⠀ ⠀ ⠀ ⠀ ⠀ ⠀ ⠀ ⠀ ⠀ ⠀ ⠀ ⠀ ⠀ ⠀ ⠀ ⠀흐르고⠀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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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흐르는 물따라⠀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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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 ⠀⠀不具의 팔다리가⠀ ⠀ ⠀ ⠀ ⠀ ⠀
⠀ ⠀ ⠀ ⠀ ⠀ ⠀ 흐르는 곳으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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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갈 수 있을까⠀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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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죽은 사람도 일어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따뜻한 마음 한잔⠀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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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권하는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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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 ⠀ ⠀ ⠀ ⠀ ⠀ ⠀ ⠀ ⠀ ⠀ ⠀ ⠀ ⠀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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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는
⠀ ⠀ ⠀ ⠀ ⠀ ⠀ ⠀ ⠀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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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마음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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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 ⠀안 아픈⠀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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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 ⠀⠀ ⠀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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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다시, 정든 유곽에서
#뒹구는돌은언제잠깨는가
#문학과지성시인선
photo by #牙疼老爷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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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뿐일까,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 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듯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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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뿐일까,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 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듯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안도감이 찾아왔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위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일렁이는 하늘, 우짖는 새, 멀리 기차 바퀴 소리, 정수리 위로 춤추는 젖은 수초들을.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서 갚기 힘든 빚이 있다. ⠀ ⠀ ⠀ ⠀ ⠀ ⠀ 느릿하고 힘 부치는 걸음걸이를 견디어주고 ... 이 길뿐일까,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 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듯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안도감이 찾아왔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위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일렁이는 하늘, 우짖는 새, 멀리 기차 바퀴 소리, 정수리 위로 춤추는 젖은 수초들을.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어머니인 이 세상에서 갚기 힘든 빚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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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하고 힘 부치는 걸음걸이를 견디어주고 힘을 불어넣어준 분들에게, 부끄럽지만 이 책을 밝은 정표(情表)로 드리고 싶다. 원고를 묶어준 문학과지성사의 여러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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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7월
韓江
#한강 #작가의말 #여수의사랑
#문학과지성사
photo by #CollinMcAd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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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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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이었다
#이기선 #삼십대의病歷 #손이닿지않는슬픔
#문학의전당시인선
photo by #JoséGallegoRob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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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 뜬눈의 밤 매우 아름다운 한자를 보았다 영원이란 말을 헤아리려 옥편을 뒤적대다가 ⠀ ⠀ ⠀ ⠀ ⠀ ⠀ 조용히 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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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 뜬눈의 밤 매우 아름다운 한자를 보았다 영원이란 말을 헤아리려 옥편을 뒤적대다가 ⠀ ⠀ ⠀ ⠀ ⠀ ⠀ 조용히 오는 비 령(零) ⠀ ⠀ ⠀ ⠀ ⠀ ⠀ 마침 너는 내 맘에 조용히 내리고 있었으므로 령, 령, 나의 零 나는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 ⠀ ⠀ ⠀ ⠀ ⠀ 비에 씻긴 사물들 본색 환하고 넌 먹구름 없이 나를 적셔 한 꺼풀 녹아내리는 영혼의 더께 마음속 측우기의 눈금은 불구의 꿈을 가리키고 零, 무엇도 약정하지 않는 구름으로 형식이면서 내용인 령, 나의 령, 내 ⠀ ⠀ ⠀ ⠀ ⠀ ⠀ 영하(零下)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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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
뜬눈의 밤
매우 아름다운 한자를 보았다
영원이란 말을 헤아리려 옥편을 뒤적대다가
⠀ ⠀ ⠀ ⠀ ⠀ ⠀
조용히 오는 비 령(零)
⠀ ⠀ ⠀ ⠀ ⠀ ⠀
마침 너는 내 맘에 조용히 내리고 있었으므로
령, 령, 나의 零
나는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 ⠀ ⠀ ⠀ ⠀ ⠀
비에 씻긴 사물들 본색 환하고
넌 먹구름 없이 나를 적셔
한 꺼풀 녹아내리는 영혼의 더께
마음속 측우기의 눈금은 불구의 꿈을 가리키고
零, 무엇도 약정하지 않는 구름으로
형식이면서 내용인 령, 나의 령, 내
⠀ ⠀ ⠀ ⠀ ⠀ ⠀
영하(零下)
⠀ ⠀ ⠀ ⠀ ⠀ ⠀
때마침 너는 내 맘속에 오고 있었기에
그리움은 그리움이 고독은 고독이 사랑은 사랑이 못내 목말라
한생이 부족하다
환상은 환상에, 진실은 진실에 조갈증이 들었다
⠀ ⠀ ⠀ ⠀ ⠀ ⠀
령, 조용히 오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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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글을 쓴다 그를 쓴다
삶과의 연애는 영영 미끈거려도
#이현호 #령(零) #라이터좀빌립시다
#문학동네시인선
photo #movie #파란대문 (1998)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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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방은 작고 아늑했다. 하이든 사진이 걸려 있었고 침대와 화장대, 키 낮은 책장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고모의 책장에서 신경숙 소설 『깊은 슬픔』이나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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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방은 작고 아늑했다. 하이든 사진이 걸려 있었고 침대와 화장대, 키 낮은 책장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고모의 책장에서 신경숙 소설 『깊은 슬픔』이나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었다. 신경숙 소설에는 야한 장면이 나와 심장이 두근거렸고, 최영미의 시집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서정윤 시집 『홀로서기』도 있었는데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떤 슬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게 뭘까, 생각하며 마음의 출처를 찾아 서성거리는 게 재밌었다. 고모 방에는 당대의 베스트셀러들과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가 함께 어울려 ... 고모 방은 작고 아늑했다. 하이든 사진이 걸려 있었고 침대와 화장대, 키 낮은 책장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고모의 책장에서 신경숙 소설 『깊은 슬픔』이나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었다. 신경숙 소설에는 야한 장면이 나와 심장이 두근거렸고, 최영미의 시집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서정윤 시집 『홀로서기』도 있었는데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떤 슬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게 뭘까, 생각하며 마음의 출처를 찾아 서성거리는 게 재밌었다. 고모 방에는 당대의 베스트셀러들과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가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다. 고모가 피아노 학원에 아이들을 가르치려 가고 나면 혼자서 책을 꺼내 보거나, 침대에 잠깐 누워 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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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는 엄격했지만 때론 상냥했으며, 내가 알기로 마음이 어렸다. 자신만의 교육 철학이 있었고 독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내가 취학하기 전부터 동화책을 베껴 쓰게 했는데 나는 끙끙거리며 동화책을 필사하다 한글을 깨쳤다. 순전히 고모가 무서웠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책을 읽고, 동시를 달달 외웠지만 이때의 독서 체험과 자연스럽게 밴 동시의 리듬이 훗날 내 문학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고모는 대학로 파랑새 극장에서 어린이 연극도 자주 보여주었다. 덕분에 나는 삐삐며 피노키오, 헨델과 그레텔, 장화 신은 고양이들이 실제로 있다고 믿었다. 무대에서 그들은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으니까, 거짓말을 하면 거짓말을 하면 코가 자라날까봐 뭉툭한 코를 만져보며 두려움에 떨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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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모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혼자 영화 봤다. 어린애들은 볼 수 없는 영화라고 했는데, 볼 수 없다니까 더욱 궁금했다. 비디오테이프 제목을 살짝 봤더니 <퐁네프의 연인들>이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고모를 바라봤지만, 보게 해달라고 조를 수는 없었다. 고모는 목소리와 분위기만으로 아이들을 제압하는 사람이었다.
이십대 중반에 프랑스 영화감독 레오 까락스를 좋아해 작품을 하나씩 찾아보던 중 <퐁네프의 연인들>을 발견했다. 당연히 고모가 떠올랐다. 영화를 두 번 봤고 가슴이 아팠고, 두근거렸다. 고모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고모는 씩씩하고 활기차 보였고, 어떤 일이든 혼자 해결하려 했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살림을 책임졌던 집안의 큰 어른이었고 강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모도 나처럼, 나와 똑같이 상처받기 쉽고 삶이 간단치만은 않은, 때로 삶을 힘겨워하며 어둠 속을 헤매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랑과 예술에 대해 두근거리고 풍부한 감성과 꿈이 있던 평범한 여자. 강철로 만든 사람이 아닌 그냥 약한 사람. 고모는 많은 날들을 고모부와 소원하게 지내며, 외롭고 찬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을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 ⠀ ⠀ ⠀ ⠀ ⠀
생각난다. 어릴 적 철없는 내가 고모는 피아노를 아주 잘 치잖아요. 그런데 왜 피아니스트가 안 됐어요? 라고 질문을 하면 어두운 종이 한 장이 얼굴에 내려오듯, 슬픈 표정으로 변하곤 했던 고모의 얼굴. 툭, 떨어지던 고개.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다리 위를 걷는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을 보며, 젊고 예쁜 아가씨였던 고모, 아직 삶의 어두운 면을 보기 전 발랄했을 고모를 떠올려본다. 지금도 신문에서 읽은 문태준이나 안도현의 시에 대해 나와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고모. 작고 어두운 방에서 혼자 웅크리고 낮잠을 자던 고모. 내게 피아노와 클레멘타인 노래와 수많은 인형극과 책을 보여주고. 문학의 씨앗을 심어준 고모가 벌써 육십대 중반이다. 한없이 강할 것만 같던 고모가 얇아지고 있다. 무릎 수술을 해서 목발을 짚어야 걸을 수 있다. 부스러지기 쉬운 꽃잎 같은 고모의 인생이 내 앞에 흘러간다.
#박연준 #소란 <고모 방>
#북노마드
photo by #LukaszWierzbow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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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달빛이었어. 흰나비 꽃가루에 눈이 먼 것 같은 아득함이었어. 몽롱함이었어. 썰물과 밀물 사이 멈춘 부푼 호흡이었어. 공중에 수천 개 조각으로 부서지는 환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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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달빛이었어. 흰나비 꽃가루에 눈이 먼 것 같은 아득함이었어. 몽롱함이었어. 썰물과 밀물 사이 멈춘 부푼 호흡이었어. 공중에 수천 개 조각으로 부서지는 환한 물방울이었어. 유전자였어. 아! 탄성에 허공 한쪽이 부르르 몸을 떠는 오르가슴이었어. 꽃이 필 때마다 몸이 쑤셔 전생이 환히 보인다는 할머니 처녀 때 키스하며 젖던 축축함이었어. 후드득 풀어지던 젖가슴이었어. 향기였어. 차갑게 불을 삼키고 간 바람이었어. 연분홍 살 속이었어. 첫사랑이었어. ⠀ ⠀ ⠀ ⠀ ⠀ ⠀ 꽃 속에서 한 영혼이 태어나고 있었어. 그렇게 첫울음을 터뜨리고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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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었어. 흰나비 꽃가루에 눈이 먼 것 같은 아득함이었어. 몽롱함이었어. 썰물과 밀물 사이 멈춘 부푼 호흡이었어. 공중에 수천 개 조각으로 부서지는 환한 물방울이었어. 유전자였어. 아! 탄성에 허공 한쪽이 부르르 몸을 떠는 오르가슴이었어. 꽃이 필 때마다 몸이 쑤셔 전생이 환히 보인다는 할머니 처녀 때 키스하며 젖던 축축함이었어. 후드득 풀어지던 젖가슴이었어. 향기였어. 차갑게 불을 삼키고 간 바람이었어. 연분홍 살 속이었어. 첫사랑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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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서 한 영혼이 태어나고 있었어. 그렇게 첫울음을 터뜨리고 수줍은 첫인사를 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던 아주 오래전 잊어버린 당신이 피어나고 있었어. 꿈이었어. 아득함이었어. 눈물이었어. 일장춘몽이었어. 수천 개의 봄이 긴 끈으로 이어지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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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웅, 라일락 질 무렵
#나는누가살다간여름일까
#문학동네시인선
#MillenniumMambo (2001)
#shu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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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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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왼손으로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 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 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왼손으로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면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바라며 쓴다. 심장이 뛴다. 꽃잎이 흩어진다. 언젠가 타오르던 밤하늘의 불꽃. 터져 오르는 빛에 탄성을 내지르며. 나란히 함께 서서 각자의 생각에 골몰할 때.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 내 속의 아름다움을 따라갔을 뿐인데. 나는 피를 흘리고 있구나.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었구나. 되돌아보아도 되돌릴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쉽게 찢어지고 짓무르는 피부. 멍든 뒤에야 아픔을 아픔이라 발음하는 입술. 모래 폭풍은 언젠가는 잠들게 되어 있다. 다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밀려오기 전까지. 너와 나라는 구분 없이 빛을 꽃이라고 썼다. 지천에 피어나는 꽃. 피어나면서 사라지는 꽃. 하나 둘. 하나 둘. 여기저기 꽃송이가 번질 때마다. 물든다는 말. 잠든다는 말.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죽기로 하였다.
#이제니 #마지막은왼손으로
#왜냐하면우리는우리를모르고
#문학과지성사
photo by #TomislavKrulj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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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manimo_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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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제대로 패배한 사람이었지. 순하게 늙고, 완전하게 패배하고 싶어했고 결국은 성공했으니까. 대학 때는 이를 악물고 아버지의 저 패배주의를 절대 닮지 않겠다고, 패배주의를 증오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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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제대로 패배한 사람이었지. 순하게 늙고, 완전하게 패배하고 싶어했고 결국은 성공했으니까. 대학 때는 이를 악물고 아버지의 저 패배주의를 절대 닮지 않겠다고, 패배주의를 증오한다고 치를 떨었지. 요새는 이런 생각이 들어. 도대체, 제대로 패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그렇지 않아? - 오래전 알코올중독자들이 있는 폐쇄병동으로 아버지를 면회 갔을 때 말이야. 휴게실에서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버지의 등 뒤편에서 맨발로 탁구를 치다 나를 보려고 뛰어나오던 아저씨들을 봤어. 아버지는 웃으며 ‘내 똘마니’들이라고 장난스럽게 소개했어. 난 한심하단 ... 내 아버지는 제대로 패배한 사람이었지. 순하게 늙고, 완전하게 패배하고 싶어했고 결국은 성공했으니까. 대학 때는 이를 악물고 아버지의 저 패배주의를 절대 닮지 않겠다고, 패배주의를 증오한다고 치를 떨었지. 요새는 이런 생각이 들어. 도대체, 제대로 패배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그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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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알코올중독자들이 있는 폐쇄병동으로 아버지를 면회 갔을 때 말이야. 휴게실에서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버지의 등 뒤편에서 맨발로 탁구를 치다 나를 보려고 뛰어나오던 아저씨들을 봤어. 아버지는 웃으며 ‘내 똘마니’들이라고 장난스럽게 소개했어. 난 한심하단 눈빛을 담고 그들을 쳐다봤지.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해사한 표정으로 말하더라. “형님이 딸 시집을 보여주면서 자랑 많이 하세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네, 하고 얼른 고개를 숙였는데 마음이 이상하더라. 나는 매번 아버지를 구박하기만 했는데, 아버지는 이곳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는 저 바보 이반들하고 우루루 몰려가 담배를 피우고, 우루루 몰려가 종이학을 접으며, 갇혀서, 갇혀서, 갇혀 있으면서까지 날 자랑했다니. 내가 뭐라고. 얘기를 더 나누다 일어서려는데 아버지는 내가 남긴 믹스커피를 보더니 더 마시지 않겠냐고 묻는 거야.
생각 없다고, 이제 가봐야 한다고 말하며 일어서는데 아버지가 종이컵에 담긴 내 커피를 선 채로 조금씩 나눠 다 마시더라고. 마음이 싸하게 아파서, 안에 커피도 없냐고 괜히 짜증을 부리고 말았어. 아버지는 쭈뼛쭈뼛 손을 흔들고 나를 배웅했고 철문이 닫혔지. 늘 그렇듯이 닫혔어. 돌아서서 나오는데, 일요일이라고 안에서 노래자랑을 열었나봐. 마이크 잡은 누군가가 <고래사냥>을 불러재껴. 등뒤로 철문은 굳게 닫히지, 아버지는 ‘또’ 갇혀 있지, 자~ 떠나자고 고래사냥은 흘러나오지. 정말 죽겠더라. 얼마나 울면서 길을 걸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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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일본의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가 그랬다지?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는다면 갖다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웃었던지. 맘 놓고 웃을 수만은 없지만. 그만큼 힘들고 아픈 존재란 말이겠지.
미나, 우리는 에둘러 가자. 급하게 않게 돌아서 가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아프게 해도 그거 다 달게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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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상은 모든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관대해야해.
세상은 모든 농부들에게 잘해야 해.
세상은 모든 바보 이반들을 사랑해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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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자, 미나. 곁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응원할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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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축축한 파랑들을 널어 말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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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소란 <바보 이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북노마드
photo by Jonathan Leonard Wid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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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manimo_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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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모란이 다 졌어. 봄날이 가는 것이 못 견디겠는 날이 있는가 하면 기다림의 힘으로 살아봐야지 하는 날도 있더라. 지금은 후자야. 기다림을 지팡이 삼아 가는 봄을 배웅하며, 힘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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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모란이 다 졌어. 봄날이 가는 것이 못 견디겠는 날이 있는가 하면 기다림의 힘으로 살아봐야지 하는 날도 있더라. 지금은 후자야. 기다림을 지팡이 삼아 가는 봄을 배웅하며, 힘내야지. 기억해? 우리 예전에 술 마시면서 서로를 두고 바보 이반이라고 놀려대며 웃은 적 있지? 못 당한다며. 무식하게 앞만 보고 간다고. 그리고 우리는 서로 바보 이반이 참 좋다고 했지. - 손해보는 사람들, 좀 느린 사람들, 에둘러 가는 사람들, 도무지 부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이 약해 세상에 잘 속는 사람들, 사랑할 때 마냥 순정한 사람들, 꼼수를 부리지 못하는 사람들, 속은 줄 ... 미나, 모란이 다 졌어.
봄날이 가는 것이 못 견디겠는 날이 있는가 하면 기다림의 힘으로 살아봐야지 하는 날도 있더라. 지금은 후자야. 기다림을 지팡이 삼아 가는 봄을 배웅하며, 힘내야지. 기억해? 우리 예전에 술 마시면서 서로를 두고 바보 이반이라고 놀려대며 웃은 적 있지? 못 당한다며. 무식하게 앞만 보고 간다고. 그리고 우리는 서로 바보 이반이 참 좋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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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보는 사람들, 좀 느린 사람들, 에둘러 가는 사람들, 도무지 부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이 약해 세상에 잘 속는 사람들, 사랑할 때 마냥 순정한 사람들, 꼼수를 부리지 못하는 사람들, 속은 줄 알아도 허허 웃거나 고개를 숙이고 울 뿐 뭘 못하는 사람들, 허리가 호미처럼 굽어도 쉬지 않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 김수영의 시구에 나오는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김수영 「거대한 뿌리」 중에서)에 속하는 이들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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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들을 정말 사랑하지? 사랑 안 하고 못 배기지?세상의 잣대로 보자면 그들은 그냥 ‘약자’라고 불리겠지. 그런데 그거 살 말한 사람들, 가르치려는 사람들, 기득권층이 편의상 이름 붙인 거 아닌가? ‘약자’라는 말도 불쾌해. 우리는 그냥 우리식대로 ‘바보 이반’이라고 부르자. 세상에는 바보 이반들이 꽤 있고, 그들이 있어 아직 죽을 만큼 나쁘지 않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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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버이날을 맞이해, 미나가 오랜만에 충청도 청양으로 친정 나들이를 간다고 했지. 잘 다녀오라고 메시지를 주고받은 지 하루가 지났을까. 미나에게서 연락이 왔어. 앞으로 더더욱 친정에 못 가겠다며 엉엉 울었지. 연유를 물으니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전보다 더욱 연로해지셔서 그 모습을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다고 했어. 평생 한 번을 편하게 쉬지 못 하고 형벌처럼 농사일에 매달려 허리가 꼬부라지고 나뭇가지처럼 종아리가 가늘어진 부모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오죽했을까. 눈물이 핑 돌아 혼났어. 미나는 늙은 소처럼 비쩍 말라 절뚝이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 동안 힘들 거라고 말했지. 부모님을 뵙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퉁퉁 부은 눈으로 가슴에 자글거리는 돌멩이들을 다독이느라 애썼을 거야. 전에 내가 얘기한 적 있지? 김민기의 노래 <서울로 가는 길>을 듣고 아침부터 소주 한 잔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어느 소설가 이야기.”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이런 가사가 나오는 노래인데, 정좌하고 들어보면 꽤 눈물이 나. 미나도 들으면 눈물을 참기 힘들 거야. 게다가 김민기 목소리. 기대 자고 싶은 그 목소리는 왜 그리 슬프고 묵직한 거야. 미나는 울다가 말했지. “철없는 생각이지만 차라리 고아였으면 좋겠어.” 다른 부모 반만이라도 건강하고 잘 사셨으면 좋겠다는 미나의 마음을 이해해.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내 마음도 그랬던 것 같아. 쉰 두부처럼 묽게 상한 아버지. 신생아처럼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아버지. 아버지는 침울한 목소리로 살고 싶지 않다고 했지. 조용한 목소리였어. 그때마다 나 또한 고아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철없이. 고아라면 누구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아프진 않았을 거라고 이를 갈았지. 사랑하니까. 너무나 사랑하니까 가난하고 약하고 땅벌레처럼 납작 업드려 사는 저이들이 못 견디겠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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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우리는 고아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야. 착하고 여리고 언제나 패배하는 부모를 만나 얼마나 다행이야. 사랑하고 속상해하고 찢어질 가슴이라도 있어 시를 쓰며 살게 됐잖아. 울지 말자. 세상에는 더 많이 가지려고 남들을 밟고 경쟁해서 기어코 위에 올라선 사람들이 있지만, 올라서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광대처럼 방방 뛰는 사람들도 있지만 풀잎 뒤에 붙어 그늘보다 더 어둡게 조용히 살다가 사라지는 이들도 많지. 세상이 무어라든 그냥 묵묵히 아래를 보고 걷는 사람들, 미나 부모님처럼 허리가 호미가 되어 온몸으로 밭을 갈다 늙는 사람들 말이야. 그들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바보 이반이라고, 세상에 필요한 사람들이야, 그들이 얼마나 순결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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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바보 이반이 이긴다고 생각해. 세상을 살리는 것은 바보 이반들이야. 그들의 슬픔과 그들의 한이 노래를 살게 하고, 세상을 적셔준다고 믿어. 우리도 가능한 오래도록 ‘바보 이반’으로 살자.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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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소란 <바보 이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북노마드
photo by Brian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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